(박록삼 기자) 미디어 대전환기, '언론의 자유'·'기자의 책임' 모두 놓치지 말아야죠!
Q. 사내 입장문이 큰 화제가 됐습니다. 박 전 위원은 호반건설이 <서울신문> 대주주가 되려고 할 때 그것을 막으려고 했던 우리사주조합장을 역임하셨지요. 호반건설이 <서울신문> 대주주가 된 이후 <서울신문>의 호반건설 검증기사들이 삭제됐고, 지난해엔 20명 가까운 기자들이 회사를 떠나는 상황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박 전 위원님의 퇴사는 이런 상황에 대한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고 이해하고 있는데요. 퇴사 이후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지내셨는지요?
25년 동안 한 회사의 기자로서 살면서 지내왔죠. 나름대로 언론이 지향해야 할 어떤 가치나 목표를 <서울신문>서 구현해 보고 싶은 마음이 컸는데요. 제 딴에는 여러 노력을 기울여왔는데 최근 몇 년간 한계를 많이 느꼈습니다. 단일회사에서 여러 실험과 시행착오를 거쳐 고유의 성과를 내고 그 모델을 확산시키는 게 가장 바람직하긴 하지만, 제가 경험한 문제가 한 회사만의 문제가 아니었던 만큼, 이제는 다른 방식으로 실험하고 노력하고 도전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의 계획은, 연말에 한국기자협회 회장 선거가 있는데 기자협회를 통해 대전환기 속 우리 언론의 비전과 목표를 담아보기 위한 도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Q. 한국기자협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시려고 하는군요. 지금은 한국기자협회 부회장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기자협회 부회장 직함을 달고 있었던 것은 한 3년 반 됐고, 기자협회란 조직과 인연을 맺은 것은 17~18년 쯤 됐습니다. 12년 전에는 수석부회장을 하기도 했어요. 그런데 이 조직 자체가 원체 오래된, 역사가 60년이 된 조직이다 보니까 조직 운영 측면에서 좀 관성화된 부분이 있습니다. 바깥에서는 언론노조가 하듯이 세상을 바꾸는 그런 역할들을 해달라는 요구도 있는데, 원체 내부 구성원들의 스펙트럼도 넓고 해서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기에 제가 여기에서 기자로서 회사 <서울신문>에서 가져왔던 문제의식들을 추구해야겠다, 그러면서 기자협회라는 조직의 변화와 혁신도 이끌어내야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Q. 그런데 <서울신문>을 퇴사하셨는데도 기자협회 부회장이란 직함은 유지가 되는 것인가요?
우리 규약에 해당 규정이 있습니다. 6개월 정도는 현직 기자가 아니더라도 곧 다른 회사로 옮겨갈 수도 있는 거니까 기자협회 회원 자격은 유지가 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회장 선거에 출마하기 위해서는 기자협회 회원이어야 하는 만큼 이미 한 인터넷 언론사로 소속을 옮겨 있는 상태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조금 시간을 가지면서 연말의 선거를 차분히 준비하고 있는 것이죠.
Q. 25년 동안 <서울신문> 기자로 지내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긴 세월이잖아요. 그간 여러 가지 매체 환경의 변화를 체감하셨을 것 같습니다. 포털사이트도 경험하고 SNS도 경험했을 것 같은데, 그런 변화를 겪어내면서 특히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게 있을까요?
네, 그 세월을 돌이켜보면 참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었지요. 그 기간 동안 언론 환경이 격변하면서 기자들은 ‘기레기’라고 불리게 됐는데요. 제가 보기엔 그러한 조류는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고 핵심은 미디어 산업 자체의 구조적인 변화들이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것이라고 봐요. 그런데 지금 말씀하신 포털사이트나 SNS 이전에, 제 생각에는 ‘무가지’가 나오기 시작한 게 가장 큰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미디어 산업이란 영역 자체를 흔들어댄 것의 출발은 무가지의 출연이었어요. 언론시장과 여론시장이 급격히 재편되는 첫 단추였습니다.
Q. 무가지는 1990년대말쯤 나타나기 시작했지요?
네 그렇지요.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 급속도로 늘어납니다. 왜 그렇게 됐냐고 하면 무가지란 게 해당 매체의 입장에선 사업성이 있어요. 그래서 잘 알려진 <메트로> 등 여러 무가지들이 우후죽순처럼 나오게 되죠. 과거에는 사람들이 지하철 가판대에서 신문을 몇백원 주고 구매해서 지하철 이동시에 신문을 펴서 다들 들고 보는 습관, 문화가 있었는데, 그게 무가지로 대체되기 시작한 거죠.
생각해보면 그래요. 보통 사람들은 특정 매체가 지면에 담고 있는 그 가치를 보고 싶다기 보다는 그저 뉴스를 보고 싶은 겁니다. <조선일보>든 <한겨레>든 그 논조 이전에 일단은 뉴스를 보고 싶어서 신문을 산 거죠. 그러니 ‘메트로’가 공짜로 나오면서 그걸 보는 걸로 충분해진 거죠. 그렇게 지하철 가판대가 약화되기 시작한 것이 미디어 산업의 전환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었습니다.
다들 뉴스를 소비하기는 하는데, 미디어 콘텐츠란 게 이제 돈을 내고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란 점을 처음으로 알려준 현상이었죠. 저는 우리 언론들이 이 무가지가 출발하는 시점에 그 함의를 깨닫고 대응을 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에 대한 고민이 그 당시에 부족했습니다. 만약에 당시에 차별화된 콘텐츠, 그러니까 무가지보다 좀더 심도깊은 콘텐츠를 만들려고 노력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런 아쉬움이 남는 거죠. 그러나 그런 대응을 하지 못했고 단순하게 ‘우리 신문이 안 팔립니다’라고만 한 거죠. 그리고 각자도생하려고만 했죠. 이것은 예외없이 거의 모든 언론이 그랬던 것 같아요.
그때 대응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미디어로서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되고, 그 다음에 네이버나 다음과 같은 포털사이트가 나타났을 때 아예 미디어의 주도권을 통째로 포털사이트에 넘겨주게 됐다고 생각합니다. 언론시장과 여론시장의 다양성은 민주주의의 뿌리이자 꽃이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들이 보기엔 중요하지 않더라도 같은 뉴스라도 매체별로 미묘하게 다릅니다. <조선일보>와 <한겨레>만 다른 게 아니라 <동아일보>, <한국일보>, <서울신문>, 그리고 지방지들까지 온 매체들에게 다른 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매체들이 취하고 있는 게이트키핑의 권한이, 어느 순간 포털사이트로 넘어가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의 상황이 온 거죠. 개별 매체들은 그 점에 저항하지도 못하고 우리 매체 콘텐츠를 포털사이트에 싣지 못해 안달이 나는 상황이 됐죠. 여론은 점점 획일화되고, 클릭 숫자 유발을 위한 상업적 경쟁만 난무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미디어 산업의 운영 방식과 형태들이 너무 많이 바뀌어져 버리게 됐습니다.
Q. 포털사이트 문제는 2000년대 후반에 두드러지게 지적됐던 것 같습니다. 요즘은 좀 뜸하다는 생각도 드는데요. 지금은 포털사이트가 아니라 다른 요인이 더 문제인 걸까요?
물론 산업적인 측면에서 포털사이트 문제는 여전히 중요합니다. 포털사이트 입장에선 언론계가 자기들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라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실제로도 언론노조든 기자협회든 포털을 규제해야 한다는 인식이 큽니다. 포털에게 미디어의 기능과 역할과 과제와 책임을 부여하려고 했죠. 그런데 이게 이제 좀 무의미해졌다는 생각도 들어요. 가령 챗GPT가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고 하면 우리가 포털에게 씌운 규제책은 또 무의미해지지 않을까요? 포털규제도 안할 수는 없는데, 콘텐츠를 만들어 낸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고민이 더 필요한 것 같아요. 안 그래도 포털의 시대가 열리면서 미디어들의 개별적인 특성이 희미해졌는데요. 기술변동으로 인해 그런 경향성은 더 강화되지 않을까요? 저는 여론의 다양성, 언론 시장이 다양성의 가치를 담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전체 미디어 산업의 측면에서 볼 때엔 그러한 다양성이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Q. 생각해보면 유튜브 알고리즘 방식도 그런 식인데요. 하나의 영상을 보면 비슷비슷한 것들을 띄워주는 것이죠. 그래서 다양성이 담보되기는커녕 서로 언론사 표현으로는 ‘우라까이’, 베끼기가 성행하게 되고요. 7~8개가 비슷하다고 치면 그 중에 한 개는 스스로 자료를 찾아서 만든 것일 수 있는데, 소비자 입장에선 그런 콘텐츠를 골라서 존중해주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거든요. 생산자들에겐 굉장히 갑갑한 상황이죠.
그렇겠지요. 제가 유튜브까지는 잘 모르지만 SNS에서 기사가 유통되는 상황을 고려하면요. 이런 매체 노출 환경에선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들이 팽배할 때, 어느 한쪽 입장에 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콘텐츠가 훨씬 더 노출도가 높아지고 호응도가 많아지니까요. 콘텐츠 만든 사람 입장에선 그래야 훨씬 더 신나겠죠. 그래서 모두 다 이쪽 아니면 저쪽, 그러니까 극단의 입장을 대의하게 됩니다. 요새 ‘수박’이란 말도 많이 쓰이고 ‘너는 박쥐냐. 왜 이거와 저거 사이에서 선택하지 않느냐’와 같은 요구들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봐요. 그래서 점점 더 이쪽과 저쪽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이성과 합리의 가치를 지키고자 하는 콘텐츠들은 사라지거나 설 자리를 잃게 되고 있습니다.
Q. 말씀하신 것을 듣고 생각해보니, 십여 년 전, 그러니까 2013년도쯤만 하더라도 일종의 균형을 잡는 콘텐츠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수요가 있었고 환호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균형 잡는 콘텐츠에 대한 생태계도 존재했던 셈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거의 찾아 보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그런 콘텐츠가 설 자리가 너무 줄어들어 버렸죠. 사실 제가 <서울신문>을 떠나야 했던 것도 그런 이유와 포개집니다. <서울신문>이 독립언론으로 재탄생함을 통해 정치적 권력과 자본에서 자유로울 뿐 아니라 극단적 대립과 갈등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콘텐츠를 생산하는 매체의 모범이 되길 바랐는데 좌절하고 말았죠. 호반건설이 서울신문을 인수한 것은 단순히 신문사 하나가 건설자본의 품에 들어갔다는 문제가 아니라 전환기 속 언론의 새로운 실험과 도전이 사라졌음을 뜻하고 특정한 이해관계의 진영으로 기울어져버린 것이기에 더욱 아쉬운 부분입니다.
Q. ‘기울어졌다’는 건 어떤 방식으로 느끼셨을까요?
<서울신문>은 과거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정부 지분이 30% 쯤 있는 매체입니다. 그래서 정부가 보수정부이든 민주정부이든 간에 그 정부의 입장을 반영하려는 노력이 있는 매체였죠. 어떤 의미에선 주주의 입장을 잘 반영하는, 시장친화적인 매체죠. 저는 매체가 주주 구성을 어느 정도 반영해주는 것도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서울신문>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좀 왔다 갔다 하는 매체였는데, 그 순기능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균형 속에서, 어느 정도 중심을 잡으면서 왔다갔다 하는 게 있었거든요. 정권이 바뀔 수가 있으니까 매체 내부에 진보적인 사람, 보수적인 사람이 같이 있었죠. 그래서 조금 넓은 스펙트럼 속에서 그 다양한 사람들이 모두 내부 구성원이라는 인식에서 이 사람도 안 버리고 저 사람도 안 버리는 방식으로 운영된다는 점이 장점인 회사였습니다. 남들이 보기에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듯하다 느낄 수 있었겠지만, 그런 방식이 가진 장점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호반건설이 대주주가 되고 오너십이 좀 더 명확해지면서 생긴 일이라고 저는 판단하는데, 최근엔 좀 더 많이 보수 쪽으로 쏠렸어요. 제가 오너십의 의중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본인들의 성향이 보수인 것인지, 아니면 지금 보수정부가 너무 강성해서 이런 것이고 정권이 교체되면 또 거기에 조금 호응해서 갈지 어떨는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지금 현상적으로 나타나는 흐름은 예전 서울신문의 기우뚱함에 비하면 너무 심하게 기울어졌다, 이렇게 보는 것이죠. 이게 자본의 논리로 봐도 합리적인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로요.
Q. 퇴사 직전 쓰신 글들을 보면 주제가 다양하더라고요. 정치적 칼럼도 있지만 문화적인 칼럼, 그리고 생활 에세이도 있었습니다. 원래 관심사가 그렇게 다양하셨을까요?
그렇다기보다는 좀 제약조건이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을 다소 드러내는 칼럼은 한달에 한 번씩 원고지 10매 분량을 쓰는 ‘서울광장’이 있었고요. ‘씨줄날줄’이란 콘텐츠는 다소 연성 콘텐츠인데 6매가 안 되었죠. 맥락에 대한 부분들을 좀 편안하게 짚어내고 좀더 부담없이 읽을 수 있게끔 콘텐츠를 만드는 그런 꼭지인데 최근에는 그런 글들을 많이 써야 했습니다. 꼭 제 관심사가 아니더라도 불가피하게 썼던 측면이 있어요. 인터뷰도 했지요. ‘박록삼의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이야기’라고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1년쯤 했는데 저도 그런 인터뷰를 하면서는 다소 좀 편안했고 숨을 쉬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세상을 바꾸는 사람들 이야기를 서술하면서 다소 힐링을 받았던 거죠.
사실 제 입장에선 하고 싶은 얘기는 한 달에 한 번 ‘서울광장’ 지면에서 하는 것인데, 이제는 거기 쓰는 것을 가지고도 압박이 오더라고요. 제가 회사 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쓴 게 '전직 검사‘ 정순신의 수사관에 대해 비판하며 쓴 것인데, 제 딴에는 자체 검열도 해가면서 쓴 글인데도 회사 안 누군가에겐 몹시 불편했던 것 같아요.
Q. 25년간 회사생활을 하셨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20대 후반 정도에 입사하셨을 것 같아요. 군대시절까지 고려하면 졸업하고 그리 큰 간격없이 바로 입사하셨을 것 같은데요. 언론사를 지망하시게 된 특별한 이유가 있을까요?
저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이 기자였어요. 제 아버지가 기자셨거든요. 어린 시절 광주에 살고 있었는데, 아버지가 <경향신문> 기자를 하시다가 1980년 광주를 취재하셨고 그 와중에 공수부대에게 구타당해 팔이 부러졌지요. 그리고 그해 연말에는 해직을 당하셨어요. 이후로는 기자에 대한 선망이 컸고 그걸 하고 싶다는 식의 인지가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아버지가 그렇게 되시니 여러 모로 힘들었습니다.
광주에 대해서도 아픔이 많죠. 1980년대 초반에 서울에 있는 대학생들은 몰래 다방 같은데 모여서 함께 보던 광주항쟁의 실상을 담은 테이프가, 광주에서는 공공연하게 터미널에 브라운관 TV를 갖다놓고 틀어대는 식이었지요. 초등학생 때 겪은 것들도 있지만, 중학생 때부터 그렇게 테이프로 본 것들이 있으니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이 쌓였죠.
그런데 대학교 다닐 때는, 저는 ‘기자는 할 수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죠. 기자가 되려면 공부를 되게 잘해야 하는데, 저는 시험을 그 정도로 잘 치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던 거죠. 그러다 졸업하기 직전에 그래도 한번 시험을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1년 정도 노력을 합니다. 그중 한 6개월 정도는 꽤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아요. 1998년 8월에 졸업했으니 IMF 직후 시점이라 취업이 힘들 때였습니다.
1년 반만에 <대한매일>에 합격해서 기자가 됐으니 정말로 운이 좋았던 것 같고, 만족도도 너무 컸던 것 같습니다. <한겨레> 아니면 <대한매일>을 가고 싶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너무 좌절이 없었기 때문에, 더 문제지 않았나 싶기도 해요. 세상일이 너무 자기 생각대로 풀려도 안 되는 거였던 거죠. 저는 회사에 들어오자마자 아주 거침없이 살았습니다. 당시는 <대한매일>이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변화와 혁신에 대한 지향들이 비록 상층 중심으로 하향식으로 내려오긴 했지만 분명히 있었거든요. 내부에서 개혁적인 흐름에 대한 기대가 높았습니다.
Q. <대한매일>, 그 시절엔 ‘조중동’에 대항해서 ‘한경대’(<한겨레>, <경향신문>, <대한매일>의 준말)란 말이 생길 즈음이기도 했죠.
제가 입사한 게 그 조어가 생기기 전이었어요. 그런 흐름 속에서 전 겁도 없이 거침없이 활동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노조 전임 상근자가 되고 나중에는, 그러니까 2006년에는 노조위원장까지 되니까요. 변화의 시기란 건 늘 갈등을 유발할 수밖에 없는데 그 당시에 갈등의 한 축이 되어 열심히 살았던 거죠. 노조 전임을 할 때는 결혼 전이라서 집에도 안 가고 게시판에서 ‘키보드 워리어’ 느낌으로 토론과 논쟁도 벌이고 회사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그랬습니다.
그렇게 살았던 것에 대해서, 예전에는 후회가 없었는데 요즘은 돌이켜보면 좀 아쉽습니다. 제가 좀더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반발과 충돌과 대립도 끌어 안아가면서 변화를 추구했으면 어땠을까. 그러면 이 조직, 이 매체가 좀더 안정적으로 변할 수 있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이죠. 그래도 당시로선 재미있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25년을 회사를 다녔는데 회사가 다시 보수적이 되니 제가 성과를 냈다고 말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후회되는 건 전혀 없었는데 성과를 남겨놓지 못한 게 너무 아쉬웠던 거죠. 저는 변화와 혁신의 주체, 주역이라 생각했는데 어찌보면 안티테제로 살아왔던 것 같고 그런 느낌이 들었죠.
Q. 여기서 사람들이 헷갈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서울신문>이 <대한매일>과 같은 조직인데요. 이름이 어떻게 바뀌어왔는지 정리해주신다면요.
일단 근현대사에서 유명한 <대한매일신보>가 1904년에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양기탁을 총무로 해서 창간되죠. 그러다가 1910년에 일제에게 신문사를 뺏긴 다음에는 1945년까지 <매일신보>라는 이름의 총독부 기관지로 나옵니다. 해방 이후에는 <서울신문>이 됐고요. 이후 주욱 <서울신문>으로 가다가, 김대중 정부 들어서서 매체의 뿌리를 찾자, 정통성을 찾자고 해서 <대한매일>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죠. 그런데 그것도 한 5년 정도 밖에 안 갔습니다. 결국 <대한매일>은 5-6년 밖에 못 가는 매체명이었던 거 같아요. 다시 <서울신문>으로 이름이 바뀔 때는 제가 노조 전임을 할 때였는데 그것 때문에도 회사에서 엄청 싸웠지요. 징계도 당했고요.
Q. 마지막으로 다시 근황으로 돌아와, 한국기자협회 회장이 되신다면 이렇게 하고 싶다는 포부를 말씀해주신다면요.
점점 기자들이 자긍심이 사라지고 있지요. ‘기레기’라는 말이 보여주는 기자들의 추락한 위상에 대한 복원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말이 횡행한 데엔 기자들의 명백한 책임도 있습니다. 하지만 설령 기자들이 아무리 밉다고 해도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한 발전, 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당위적인 측면에서는 이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전체 기자 조직으로서의 과제를 설정해야 할 부분들도 있습니다. 사실 기자협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은데 지금은 안 하고 있다고 봅니다. 원체 관성화된 구석이 있죠. 그런데 기자는 독특하게 직군 전체가 선후배 관계를 형성하는 문화가 있잖아요. 독특한 조직 문화, 집단 문화죠. 오만 매체 기자들이 출입처라고 하는 하나의 공간에 같이 모여 있으니까요. 지금은 뽑는 방식이 다양하니 많이 퇴색됐지만 예전에 ‘동기’라고 표현하면 회사 동기하고 친밀감보다 타사 동기들과 친밀감이 더 많은 경우가 흔했습니다. 저 개인만 해도 그런 관계들이 20년이 지나도 유지되고 있거든요. 많은 것이 바뀌었지만 출입처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이상 아직 이런 유대감은 있다고 봅니다. 이런 것들을 잘 활용해야죠. 지금은 협회가 구성원, 회원들과 유리된 느낌이 있어서요. 기자들의 협회에 대한 소속감을 높이고, 기자의 정체성들을 건강하게 세우고, 공적 책임을 높일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는 고민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결국은 지금 윤석열 정부에서 자유라는 가치에 대한 얘기를 많이 하고 있는데요. 자유란 게 뭘까요.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론 사주의 자유에 불과했죠. 언론의 자유란 영역이 분명하게 보장될 수 있는 법적, 제도적 부분들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고, 여기에 맞춰서 기자 개개인들의 책임이 따라갈 수 있도록 해야죠. 권한과 책임이 동전의 양면인 것처럼 자유와 책임도 함께 움직이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점점 더 기자들이 자율성이 없는 월급쟁이가 되는 문화를 바꾸어 낼 수 없을 겁니다. 그런 고민들을 구성원들과 같이 해보고 싶습니다.